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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운명을 따라 들어선 화가의 길…‘풍류를 아는 작가’ 조용식 화백

채색진경산수화의 개척자 조용식 화백을 만나다

안지선 기자 | 기사입력 2011/12/20 [13:19]

[인터뷰]운명을 따라 들어선 화가의 길…‘풍류를 아는 작가’ 조용식 화백

채색진경산수화의 개척자 조용식 화백을 만나다
안지선 기자 | 입력 : 2011/12/20 [13:19]
(뉴스쉐어=경기동북본부)  조선 시대 최고의 천재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을 재현하려 애써온 작가가 있다.

호분, 석채 등의 전통안료를 사용해 우리나라 고유의 산수를 그려내는 채색진경산수 분야의 개척자라 평가되는 조용식(43) 화백이다.

그는 요즘 지난 8월 서울 중계본동 노원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5번째 개인전 ‘우리 산하(山河)에 묻다’를 끝낸 후 다음 전시회를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 수유동 그의 작업실에서 조용식 화백을 만났다. 추운데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겨주는 그의 얼굴에는 호방한 웃음이 가득했다.

▲ 풍류를 아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조용식 화백을 설명하듯 함께 놓여있는 그림과 장구     ©양재란 기자
 
운명을 따라 들어선 미술가의 길

어릴 적부터 화가를 하고 싶었냐고 묻는 질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 운명이 날 화가의 길로 밀어냈다. 내가 원한 운명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라며 답했다.

조 화백은 “보통 화가들 보면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재능이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난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지도 않았고 재능도 없었다”며 재능이 없음을 강조하며 운명으로 이끌리게 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난 음악적 재능이 훨씬 뛰어났다. 어머니가 국악하시는 분이다. 초등학교 때 합창부에 여학생이 60명이 있었지만 남학생은 나뿐이어서 놀림도 많이 당했다. 광주·전라도 지역 어린이노래자랑에 나갈 우리학교 대표로 내가 뽑혔다. 그런데 로비가 있었는지 노래도 잘 못하는데 집이 잘 사는 애로 대표가 바뀌었다. 실망스러웠고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며 미술보단 음악적 재능이 훨씬 두각을 드러냈다며 설명했다.

한편 전국 미술실기대회가 있었는데 우리 반에서 나가기로 한 애가 갑자기 아파서 못 나가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이 내게 대신 나가라고 하셨다. 그 대회에서 국회의원 상을 받았다. 2등 정도 한 것이다. 졸지에 학교에서 미술을 제일 잘하는 애가 되었다. 당시 시골에서 트로피를 들고 동네에 입성하니 동네에서 천재 났다고 난리 났다. 그러나 정작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 후 미술 선생님이 모 대학 그룹사운드에서 기타를 치셨는데, 연주하는 모습에 넋을 잃었다. ‘저 사람 반주에다 평생 노래만 불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선생님이 기타를 가르쳐주실 테니 미술부에 들어오라고 하셔서 두 말 없이 들어갔다. 내가 뭘 하나 시작하면 끝까지 하는 스타일이라, 다른 친구들이 땡땡이 치고 놀러갈 때도 나는 한결같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보니 미술부장도 했다. 고등학교 땐 먼저 진학한 중학교 시절 미술부 선배들 때문에 미술부에 들어갔다. 그림이 즐겁다기보다 '그냥 하던 것이니 하자'라는 마음이었다. 또 선배·친구와 가족처럼 끈끈하게 지내는 것이 좋았다.

홍대 주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끼많았던 사람

그림보다 노래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대학 그룹사운드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삼수를 했고 홍대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입대했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동기들은 다 고학년 되어 활동하는 애들이 없었다. 예비역이 늦게 동아리를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 미술가가 되어온 과정을 설명하는 조용식 화백     ©양재란 기자

재수, 삼수, 군대로 20대 초반 꽃다운 나이를 억눌림 속에 보냈다. 감당 안 되게 용솟음치는 끼를 대학으로 돌아와서 분출해야 했다. ‘파랑새’라는 미대 민중노래패를 조직했다. 오렌지족 퇴치운동 노래도 만들고(웃음). 홍대 주변 상가들도 홍대 문 앞 무대에서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이크 잡고 떠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대학생활을 4년 내 했으니, 졸업 후 화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화백 조용식’의 시작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현실의 벽을 느꼈다. 졸업하니 서른이었다. 방송사 엔지니어링 일을 하고 싶었지만 아마추어인 내가 전공자⋅유학파들과 경쟁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내 삶을 돌아봤다. 내가 그동안 했던 건 뭐였을까. 돌아보니 중학교 때부터 난 항상 그림을 그려왔었다. 즐겁든 그렇지 않았든, 그림은 내게 밥 먹는 일 같은 것이었다. 바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 그림을 못 그리고 살 텐데 그 삶이 가능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 인생에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내 자식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을 주고 싶었다. 그게 뭘까 고민했다. 그림이었다. 그렇게 화가의 삶이 시작됐다.

첫 6개월 정도는 많이 방황했다. 대학 때 그림만 했던 선·후배와 동기들과 달리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정체성도 없었고, 뭘 그려야 할지도 몰랐다. 내가 그린 그림이 너무 유치했다.

그러다 선생님 한분을 만났다. 우리나라 최초로 동경예대에서 오신 분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서양화를 주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그런데 동양화과로 진학하다보니 수묵화만 그리게 되었고, 채색화 선생님도 계시긴 했지만 원래 그 전공이 아닌 분이셨기에 많이 답답했다. 대학 때 친구들이 그 선생님께 배우기 위해 팀을 꾸리는데 우연히 그 친구에게 색을 쓰는 법을 물어봤다가 알게 되어 합류한 것이다. 그 분에게서 3년 넘게 배웠다. 그동안 재료에 휘둘리는 느낌이었다면 이제 재료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 그림에 의미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이라는 게 결국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자기 스토리, 개념이 없으면 그림이 공허하다. 내가 뭔가를 남겨보고 싶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그래서 대학원도 진학하여 공부하며 찾아간 게 결국 산수화였다. 먹그림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채색산수화를 내 테마로 정했다. 돈황석굴 벽에 산수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스케치를 가져다 저 벽화기법으로 산수화를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석채를 사용한 산수화를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하게 됐다. 내 산수화, 내 테마가 탄생한 것이다. 

▲ 전통안료 석채를 설명하는 조용식 화백     ©양재란 기자

실경(實景)에서 심경(心景)이 되기까지

현장에 나가 사생한 것이 숙성되고 발효되는 부화기를 거친 후에야 작품으로 그려진다. 사생하러 갈 때 작업한다는 생각 하지 않고 부담없이 가서 그린다. 스케치한 것은 가져와서 넣어놨다가 어느 날 꺼내보면 “유레카!”를 외칠 만한 것들이 있다. 그걸 작품화한다.
 
열심히 스케치한 것도 있지만, 그냥 가다가 눈길 잡는 것 있으면 대충 그려놓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넣어놨던 게 어느 날 보면 마음에 와닿고 작품으로 더 잘 그려질 때가 있다. 그 과정은 한 순간에 이뤄진다. 그러니까 현장에 갈 때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기보다는 바람과 물처럼 그냥 다닌다. 풍류다. 옛날 사람들 다 그랬지 않나. 옛날에 산수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자연 속에 들어갈 때에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목적보다는 마음을 정화시킨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 사람들의 현실은 얼마나 복잡하고 고민스러웠나. 정치권에 개입된 사람들은 특히 언제 고문당할지, 목숨을 잃을지, 구족을 멸함 당할지 자기 앞 길을 모르는 이런 세계로부터 휴식을 취할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리 비울 수 없었다. 임금도 궁에서 삼백리 이상 못 나가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자기가 직접 자연에 찾아갈 수 없으니까 화가들이 그려온 거 누워서 보면서 무릉도원이다, 상상하고 그랬던 것이다.

이렇듯 감상자는 그림을 보면서 작가의 숨결 같은 것을 전해 받지 않나. 그래서 감상자에게 휴식과 치유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화가 스스로가 먼저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는 동료화가들끼리 사생을 하러 나가면 다들 열심히 작업하고 있을 때 옆에서 노래도 부르는 등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한다.

▲ 한국화 수강생을 지도하고 있는 조용식 화백     © 양재란 기자

전문가적 의견, 객관적인 평가가 없는 개인적 감동으로서의 감상

그림이라는 게 딱 보면 좋은 거지, 다른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미적 감동이란 건 막 따져보고 공부하고 이런 데서 오는 게 아니고 보자마자 와서 내 혼을 싹 빼버리는 것이다. 고민 속에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일종의 해탈이랄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게 된다. 좋은 영화나 음악을 접하면 그 순간 행복해져버리지 않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순간적으로 오는 전폭적인 것이다.
 
내 그림을 어떤 관점과 느낌으로 봐주면 좋겠다는 생각 없다. 보시는 분들이 자기 맘대로 상상하시면 된다. 내 그림일지라도 갤러리에 걸리는 순간 감상자들의 것이다. 평론가나 언론인, 작가, 전공자들 제각각 한 그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내가 안 내려고 저쪽에 치워놓은 그림들 보고 왜 저거 안 내냐고 해서 걸어놓으면 제일 먼저 팔리는 그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림에 대한 각자의 감상이란 결국에 ‘옳고 그름’이 아닌 ‘다름’의 문제다.
 
또 그림을 보시고 자기 생각은 이렇다, 이랬음 좋겠다, 하는 마음이 든다면 와서 이야기해주시면 좋겠다. 그런 데서 생각지도 못한 힌트와 영감을 얻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게 고갈되었을 때 다른 사람의 경험을 투영할 수 있으니까. 미술사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이런 걸 볼 때 미술이란 어떤 답을 향해 가는 게 아니다. 그림에는 저작권이 없어도 될 것 같다(웃음). 작가 손 떠나면 관람객의 몫이니까. 그림 보며 마음껏 상상하고 느끼고 놀면 된다.

가까운 곳의 아름다움을 돌아보며

지난 8월 개인전에서 전시했던 <운주사> 같은 경우는 한 일 년 그린 것 같다. 내가 했던 그림 중에 가장 큰 그림이고, 지금까지 해온 작품 중 가장 애착 가는 그림이다. 그때같이 안 나온다, 그림이. 참 묘하다. 하면 할수록 늘어야 되는데, 오히려 처음 그림이 더 좋다. 뭘 모르니까 연구도 많이 하고, 테크닉이 완성 안 되어서 좀 어설픈 맛이 있는 그림이 좋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건 우리 뒷산이다. 여기 이사온 지 오래 됐는데 맨날 강원도 같은 곳만 다니고 주변을 그려본 적이 없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이제 다음 전시 컨셉을 내 주변 산수로 정했다. 인왕산 야경을 그리려고 한다. 경복궁까지 넣어서 푸른 밤의 인왕산. 겸재 정선을 포함해 인왕산을 그린 사람들은 많지만 밤 풍경은 안 그렸거든. 그래서 민속박물관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사진도 찍고 스케치도 했다.

이어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 등 서울근교를 그릴 것이다. 옛날 겸재가 한양을 그렸던 것처럼. 여기서 7년 가까이 살면서 왜 여기 이 좋은 경치를 두고 맨날 멀리 나가는가 싶었다. 여기서부터 점점 더 멀리 나가 우리 고향도 해보고 싶고, 유년시절을 보냈던 부모님의 고향인 진도도 그리고 싶다. 그런데 진도라든가 전라도쪽은 워낙 화가들이 많아서, 웬만큼 잘 그리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곳이다(웃음). 언젠가는 고향을 가서 완성을 해야지. 지금은 이 주변에서부터 시작을 하려 한다.

山水遊畵의 삶
 
솔직히 그림 자체가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과의 고단한 싸움일 때가 많다. 하지만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한편으로 풍류를 아는 작가가 되고 싶다. 삶 자체는 즐거운 거니까. 화가들이 늘 우울하고 고독하고 그런데 그런 개념을 깨고 싶다. 요즘 인간문화재 정화영, 안숙선 선생님들께 북과 장구도 배우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림 그리고 악기 켜고 노래하고 시 짓는 것이 다 한 가지였지 않나.

사는 게 참 행복하다. 결혼 늦게 했지만(40세 때) 날 인정해주고 천재라고 치켜세워주는 집사람에게 큰 덕을 본다. 집사람은 내 그림이 늘 바뀌고 새로워진다고 칭찬해준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부업을 얻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전업작가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우니까.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자기는 그림만 그려, 돈은 내가 벌 테니까!”라며 지원을 해준다. 아내가 고고학을 전공하고 중앙박물관에서 일하고 있어서 내 작품을 위한 좋은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집사람이 그림을 좋아한다. 게다가 내가 보기엔 재능도 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많이 보고 다닌 것도 아닌데 그림 보는 감각도 뛰어나고, 본능적인 게 있는 것 같다. 집사람이 그림을 그렸으면 크게 됐을 것이다.

▲ 작업실에 전시되어있는 아내의 그림     © 양재란 기자

나중에 내가 어떤 그림으로 옮겨갈지 모른다. 아니, 직업 자체를 바꿀지도 모른다. 나중에 판소리 명고수가 되어 인터뷰를 하게 될 줄 누가 알겠는가. 

< 학 력  >
1968년 전남 목포 출생
1987년 목포고등학교 졸업
199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2005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 개인전 >
2004년 제 1회 개인전 - 갤러리 서호
2006년 제 2회 개인전 - 관훈 갤러리
2009년 제 3회 개인전 - 인더박스 갤러리
2010년 제 4회 개인전 - 갤러리 이즈
2011년 제 5회 개인전 - 노원아트갤러리

< 작품소장 >
유엔사무총장 직무실 미디어룸 (UN본부-뉴욕) 2008~2009
주 UN 대한민국 대표부 (UN본부-뉴욕)
국립현대미술관(미술은행)
디키스 코리아 본사
린나이 코리아
코리아 병원
국민생활체육 전국씨름연합회

현재 덕성여대 출강

경기동북본부 = 안지선, 양재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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