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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육 살리는 샘물… 농촌보건 위생 선구자 이영춘 박사

일제강점기 가난한 농민 위해 진료 봉사 전념한 농민의 성자

이연희 기자 | 기사입력 2017/03/15 [22:25]

영혼·육 살리는 샘물… 농촌보건 위생 선구자 이영춘 박사

일제강점기 가난한 농민 위해 진료 봉사 전념한 농민의 성자
이연희 기자 | 입력 : 2017/03/15 [22:25]
▲ 전북 군산시 개정동에 위치한 이영춘 가옥의 모습. 본래는 일본강점기 일본인 최대 농장주 구마모토가 건축한 집이다.    © 이연희 기자

 

[뉴스쉐어=이연희 기자] 지난 12일 오후 전북 군산시 개정동 간호대학교 길목에서 더 들어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차분한 분위기 속에 자리한 근사한 집 한 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숲속을 옮겨 놓은 듯 잘 조성된 정원과 호박돌로 쌓아 인상적인 벽난로 굴뚝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국내 첫 의학박사 쌍천 이영춘(1903~1980) 가옥이다. 가옥의 화려함만 보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성공한 의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두 가닥의 샘물 곧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고 영혼을 치유하는 샘물이라는 의미의 ‘쌍천(雙川)’이라는 그의 호처럼 이영춘 박사는 근·현대사 속 농민들의 아픔을 고치는 한 줄기 희망이었다. 

 

이영춘 가옥은 이영춘 박사의 유품을 전시하여 기념관으로 개방돼 수탈 역사 속에 살아갔던 그의 삶과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 가옥 내부에 있는 붙박이장 모습. 이영춘 박사의 유품을 살펴볼 수 있다.   © 이연희 기자

 

◆ 일본 최대 농장주의 집… 그리고 농민 아픔을 치료하는 의사의 집  

 

이 박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지주가 부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농민 토지를 몰수하고 쌀을 수탈하기 위해 농장을 경영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농민들은 소작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소작인 2만 명에 여의도의 10배가 넘는 규모의 농지를 소유한 전국 최대 일본인 대농장주였다. 그는 현재 군산 간호대학 터인 개정동에 농장을 차리고 번영을 누렸다. 

 

이영춘 가옥은 본래 구마모토가 경성(서울)에서 군산에 올 때 일 년에 몇 번 별장처럼 사용했던 가옥이다. 해방 후에는 이영춘 박사가 이용해 ‘이영춘 가옥’이라고 알려졌다. 

 

이곳은 조선총독부 관저 건축비와 맞먹는 비용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보아도 화려한 집으로 보이는 이곳은 1920년대 건축돼 한식, 양식, 일식의 건축양식이 복합된 근대 새로운 주거문화를 보여준다. 또, ‘미터(m)법’을 적용해 건축한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이다. 

 

▲ 가옥 내부에서 일본식 복도를 볼 수 있다.    © 이연희 기자

 

가옥에 들어가면 벽난로를 설치한 응접실과 다다미를 깐 거실과 복도를 동시에 볼 수 있고 붙박이 책장이며 곳곳에 걸린 서양화는 세련미를 발산한다. 낮은 탁자 앞의 두툼한 가죽의자는 고종황제 일가가 사용하던 것이라고 한다. 

 

내부 거실은 바닥이 티크목 쪽맞춤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고 상드리에 및 가구들은 외국에서 수입한 고급자재들이다. 

 

시대에 걸맞지 않게 부유하고 화려한 가옥은 일본인으로부터 토지수탈의 실상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우리나라 농촌보건 위생의 선구자인 쌍천 이영춘 박사가 해방 후 이용한 의료사적 가치를 지닌 곳으로 2003년 10월 31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건축 예술적으로도 뛰어나 ‘빙점’, ‘야인시대’, ‘모래시계’ 등 여러 영화, 드라마 촬영장으로도 이용됐다.

 

▲ 이영춘 가옥 내부 모습. 유품을 비롯해 곳곳에 당시에 사용하던 벽난로, 의자, 탁자 등이 있으며 구마모토가 영국왕실에서 사들인 그림 작품도 눈에 띈다.    © 이연희 기자

 

◆ 명성·학자의 길 포기하고 농촌보건에 헌신

 

구마모토는 소작인이 질병을 얻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이를 쌀 수탈의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여겨 농장직영 의료원을 만들어 이영춘 박사를 초빙했다.  

 

이렇게 1935년 농장 사무실 일부를 개조해 ‘자혜진료소’라는 간판을 걸고 농촌 의료가 시작됐고 이영춘 박사는 33살 자혜의원 원장이 된다. 

 

이영춘 박사는 방문 환자뿐 아니라 한 달에 20일은 지경·대야·화호(정읍)에서 진료를 하고 밤 12시까지 진료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가혹한 수탈로 몸과 마음마저 고통받는 동족의 아픔을 치료하는 일을 뒤로할 수 없어서 20~30리의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무료 진료 왕진을 다녔다고 한다. 

 

진료 후 소작농이 아닌 일반 농가 분만 환자까지 돌아보고 귀가해서도 진료기록을 보완하고 진료소 운영 계획, 연구 활동 등으로 새벽까지 불을 밝혔다. 

 

광복이 될 때까지 농장 진료소에서 이영춘 박사가 돌본 환자는 하루에 100명 내외. 

 

그는 해방 이후로도 익산, 김제, 옥구 등까지 총 3백만 명이 넘는 환자의 무료 진료를 했고 ‘농민의 성자’라고 불렸다고 한다. 

 

명성을 얻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를 뿌리쳤고 국내 교수의 지도를 받아 탄생한 첫 박사라고 대서특필될 만큼 촉망받는 의사였지만 학자로서 길을 포기했다. 

 

가족에게 번듯한 건물 한 채 남기지 않고 평생 농촌보건을 위해 봉사에 전념했다. 

 

▲ 쌍천 이영춘 박사.    © 이연희 기자

 

◆ 치료보다 예방… 최초 학교 양호실 도입 

 

이영춘 박사는 소극적 치료보다 위생개념과 보건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학교 위생 교육에 눈을 돌렸다. 

 

이를 계기로 국내에 처음으로 양호실과 양호교사를 둔 학교가 개정보통학교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옥구군내 교원들을 초청해 위생 강습을 벌이기도 했다니 그의 순수한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박사의 열의는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1955년부터 전라도를 비롯해 충청도와 경상도까지 무의촌 진료활동에 나섰다. 또 연구소 사업으로 현 개정간호전문대학의 전신인 개정고등위생기술원이 있었다. 

 

그는 1973년 옥구군 관내 2천여 명의 50원씩 조합비를 내고 무료진료를 받는 의료조합사업을 시작해 현재 의료보험사업의 초석을 마련한 장본인이다. 

 

이렇듯 평생을 농촌보건을 위해 희생한 이영춘 박사는 1980년 11월 25일 천식이 악화하여 별세했지만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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