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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소후 시인, 소탈하지만 ‘恨(한) 많은’ 그녀를 만나다

時(시)는 ‘자기 자신을 밝혀 가는 등불과 같아..’

오미현 수습기자 | 기사입력 2016/06/23 [09:14]

[인터뷰] 오소후 시인, 소탈하지만 ‘恨(한) 많은’ 그녀를 만나다

時(시)는 ‘자기 자신을 밝혀 가는 등불과 같아..’
오미현 수습기자 | 입력 : 2016/06/23 [09:14]
▲ 오 소후 시인     ©오미현 수습기자

 

[뉴스쉐어=오미현수습기자] "나는 한(恨)이 많다고. 그 애달픔 때문에 내가 시를 쓰게 된 것 같아(웃음)"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웃는 모습이 소녀같은 오소후 시인이 광주 동구의 한 카페에 들어선다. 평소에도 자주 조용한 카페에서 차를 즐긴다는 그녀는 자연스레 밀크티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시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며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그녀. 기자는 마치 손녀가 할머니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그 이야기를 경청하며 문답을 이어 간다.
 
버들가지에 연두 빛 피는 봄날, 나의 어 머 니
엄마 아빠 모국어를 가르치더니
러브 휴먼 크리스찬 외국어까지 따라하게 하시더니 
[양림동 친정에 가고 싶다 - 오소후 시인]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녀는 나의 재능은 어머니가 준 선물이라며 붓글씨도 한문도 영어도 어머니가 먼저 가르쳐 주셨다고 전했다. ‘양림동 친정에 가고 싶다라는 시도 이런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다는 오 소후 시인.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따로 있다면
 
영문학을 전공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나로썬 인텔리젠트 지식계급이 자기의 지식계급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반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광주에서 1980년에 5.18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체류탄 터지는 곳에 가서 내가 아 광주여!’(김준태 시)를 할 수는 없지만 같은 시대 사람이기 때문에 뭔가를 하자고 결심했다.
 
그 당시 나는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가 밝아야 세상이 평화롭고 세상이 평화로워야 아이가 잘 자랄 것 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과 딸을 위해서 그리고 내 화단에 꽃을 피우기 위해서 나는 시를 써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시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얻나
 
시를 쓰다 보니 시는 발견이다라는 이런 표현을 하게 된다. 오늘도 담양 메타프로방스에 갔는데 새 한 마리가 먹이를 먹기 위해서 앉았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새는 경계를 하고 날아감 참이었다. 그래서 새가 편안히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움직이지 않고 숨죽이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자연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 영감을 얻는다.
 
또 나는 내 마음을 다스리며 그것을 시로 표현했고 또 하나의 방법으로 여행을 갔다. ‘시종자를 받는 일이다. 나는 주로 여행을 통해 발견했던 시종자를 키웠다. 그리고 내 기억에 들어온 것을 시공간의 개념의 틀에 짜맞추어 시를 썼다.
 
시를 쓰는 자신만의 시간이 따로 있나
 
박정대 시인은 밤 11시에 시작을 한다고 한다. 그때부터 밤샘 시를 쓰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는 반드시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날 때가 많았다. 내가 산사생활을 1년가량 하면서 정확하게 230분에 일어나기 때문에 시를 붙잡아본단다. 4시까지 쓰다보면 머리가 혼미해지곤 한다고 한다. 그녀는 새벽엔 말을 해도 신기(神氣)가 나가고 머리를 써도 안 좋은 거야. 새벽엔 진언만 해야 해. 나는 밤늦게 시를 쓰는 타입은 아니다고 전한다.
 
요즘 사람들은 '도서불감증'이란 말처럼 책도 잘 읽지 않고 시도 거의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가 발전해 나갈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시를 창작하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근 대중과 가까이 가고 싶어서 힐링포엠 캠프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지금 생각해보면 시를 쓰는 건 영생을 꿈꾸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다.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견디며 살아가야만 하는가?’는 본능적으로 누구나 고민하는 명제이다. 우리는 죽는다라는 명제 앞에서 이것이 견딜 수 없는 현실임을 직감한다. 그래서 시를 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남보다 더 열정적인 사람은 스스로 타오르게 된다. 자살 같은 걸 꿈꾸기도 한다는 뜻이다. 결국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글을 써 나가야하는 것이다.
 
제일 감명 깊었던 시 한편 소개 해 준다면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와 이가림 시인의 석류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시는 어떤 누군가를 울릴 수 있다. 자기와 맞는 시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나를 치유했듯이 다른 사람도 시를 통해 치유될 수 있다고 본다
  
시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수상 탄 시인이 밥을 산대니까 상도 안 받은 사람이 오면서 하는 말이 결국 시는 밥이네요라고 하더라. 시는 돈도 안 되고 국물도 없다고 하지만 나도 시를 쓰니까 밥은 먹고 산다. 그래서 시는 밥이다라는 것.
 
또 큰 돈 벌이는 안 되지만 영생을 꿈꾸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기도 한다. 시인의 작품이 남기 때문에 영생인 것이다. 모든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독자가 읽어주고 공감한 후 영원히 남기를 바란다. 교과서에 실린 명시처럼. 소위 들꽃시인은 그냥 스러질 뿐.
 
선생님의 시가 다른 시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에 나는 피안의 언어를 쓴다는 말을 들었다 (김 종 시인 시평에서). 나는 세상과 조화롭기를 원한다. 그런데 내 사주는 조화롭지 못하다. 지수화풍으로 보면 화는 가득차고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 물질세계를 이루는 다섯 가지 기본 요소)이 금이 된다면 금으로 표현되어야 할 수는 작다. 나라는 물체가 비대칭인 것이다. 그러나 꿈, 이상은 조화로운 세상을 원한다.
 
개체가 신()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시도 딱 떨어지는 것을 써야 상처도 없고 사람들에게 잘 먹힌다. 철이 유용한 것이지만 인 철 원자재만 있어선 안 되고 다양한 도구로 변형이 되어야 인간에게 이롭지 않겠는가? 우유, 치즈, 요구르트 이렇게 변하듯 어느 것이 뱃속에 좋다고 했나? 요구르트. 나도 요구르트가 되고 싶은데 아직도 철의 기운이 남아 있다. 나는 발효 숙성의 시를 쓰고 싶다.
 
시낭송도 하신다고 들었다. 언제부터 시작하셨고 시낭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 시낭송대회는 한국일보와 주간한국 주최로 1967122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신시(新詩) 6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되었다.
 
19922회 전국 재능 시낭송대회때 전국대회에서 은상을 탔다. 광주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본선무대에 진출해서 전국대회에 참가했다. 그 대회에서 리포터 경력을 지닌 젊고 예쁜 분과 예지원 원장님이 대상과 금상을 차지하고 나는 은상을 수상했다. 한복 입은 자태나 모든 것이 정말 우아했다. 물론 나도 당시 베스트 드레스 상을 수상할 정도로 꽤 우아했다.(웃음)
 
그녀는 시낭송을 하게 된 것이 우리 모국어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화제의 신선함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시낭송은 단순히 시를 외워서 들려주는 것이 다가 아니다. 시낭송을 할 때는 단정함과 우아함이 있어야 하고 그 안에 그리움과 절절함 그리고 안타까움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가 정말 중요하다시낭송의 목적은 오장육부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의 소리까지 들려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수련이 되고 확장되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라고 덧붙인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견성(見性)’ 즉 찰나에 깨닫도록 늘 깨어있으라 말을 하고 싶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처럼 시간이 너무 짧다. 어느 찰나에 내가 깨달을지, 별을 볼지 모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처럼 다른 사람이 동일하게 느낀 그 순간을 그는 시를 썼다. 이를 배워야 진정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오소후 시인은 한때 시를 배우기 위해 하루에 300수를 정독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시 한 줄을 읽더라도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한다.
 
그녀는 전남대학교 영문학과(1970)를 졸업하고 남편 소암 (素菴) 김남택과 성균관대학교 경상대학원 EDPS연구과정(1972)을 수학하고 호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문학석사(1992)를 마쳤다. 200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문득 도리포에 이르러로 등단했다. 시집 <좀꽃마리2005>, <스미다2010>, <한 점 블루2013>, 영한번역 시집 <세상은 꿈꾸는 것보다 돌연하다2001> <나는 꽃2016>등을 발간하기도 했다.
 
소후(素篌)라는 이름은 백양사 주지스님이셨던 다정스님이 주셨다. 법명이자 시호가 되었고, 소후자를 줄여서 소후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시인이 한 종류의 시만 쓰지 않듯 그녀는 법정스님이 주신 별숲이라는 또 다른 어여쁜 시호도 가졌다. 때론 산암(山巖) 변시연 선생님이 불러준 이요(二樂), 산도 물도 즐긴다는 시호도 쓴다.
 
그녀는 한국시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회원, 기픈시동인(18), 별숲동인(1), <비움박물관시낭송협회> 초대회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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