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심순녀 안흥찐빵이 걸어온 40여 년고생 끝에 樂, 변함없는 찐빵 맛 이어와…
(뉴스쉐어=강원본부)김이 모락모락~나는 찐빵 한 입이면 움추렸던 마음도 녹고 배가 든든해지는 것 같다. 찐빵하면 생각나는 그곳은 바로 횡성군 안흥면. 잘알려 지지 않았던 안흥을 찐빵의 고장으로 만든 안흥찐빵의 시초 심순녀(70) 할머니. 너도나도 원조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진정한 안흥 찐빵의 원조라 하는 심순녀 할머니를 만나 찐빵이 태어나게 된 이야기를 들어봤다.
먹고 살길 막막했던 장돌뱅이 새댁 19살,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무작정 양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나섰다. 누가 양말을 사길 하나? 안되겠다 싶어 과일을 이고 팔러 다녔다. “이건 모가지가 쑥 들어갈 만큼 무거워서 못해먹겠네” 싶었다. 그나마 어려운 시절 옥시기(옥수수)밥 해먹던 때라 옥시기랑 고등어는 그나마 잘 팔렸다. 비누장사도 했다. 무거운 비누는 그나마 사람들이 옷을 빨아 입어야 하니까 잘 팔렸다. 참외 장사도 꽤 잘됐다. 어떤 아저씨가 “새댁이 저렇게 힘들게 파는데 많이 팔아줘야지” 고마운 한마디에 눈물이 흘렸던 새댁이 심순녀 할머니다.
안흥찐빵의 시작 찐빵의 시작이 호떡장사다. 장사하러 원주역에 갔다 호떡 장사하는 걸 보고 호떡 만드는 법을 배우려니 그도 쉽지 않았다. 우연히 고향 아저씨를 만나 호떡 반죽하는 법을 배웠다. 어렵게 시작한 호떡장사가 풀빵, 김말이, 핫도그, 도넛, 오뎅, 튀김 등을 파는 분식집이 됐다. 풀빵과 호떡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찐빵장사도 함께 시작했다. 처음엔 호떡이 더 잘 팔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찐빵장사가 더 잘됐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가 좋아지면서 전국 곳곳으로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가는 사람들에게 찐빵은 부담 없는 든든한 끼니가 되었고 “맛있다”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방송도 타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흥에 있는 빵’이 맛있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안흥을 찾는 발걸음도 늘어갔다. “연예인들도 많이 왔지~ 그럼 뭐해 바빠 죽겠는데 연예인 얼굴 볼 새가 있나?” 전국에서 심순녀 할머니 찐빵을 사러 온 사람들이 두 줄이고 세 줄이고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줄 서서 기다리다 못 사면 내일이라도 사가겠다며 여관에서 묵고 다음날 찐빵을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심순녀 찐빵을 이어받은 아들 김태봉(42)씨는 “빵이 많이 팔릴 때는 그만큼 경기가 안 좋아졌다는 것”이라며 “찐빵은 경제적인 부담 없고 속은 든든하니 어려울 때 더 많이 찾아주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심순녀 찐빵은 IMF의 위기에도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성장해갔다. 안흥찐빵의 위기, 그리고 정도(正道) 그렇게 심순녀 찐빵으로 시작한 안흥찐빵은 안흥의 명물이 되어 찐빵집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탄탄대로였던 심순녀 찐빵에도 위기가 있었다. ‘상표등록’을 하라는 손님의 말에 “에이, 뭐 이런 것 가지고 상표등록까지…”하고 흘려들었던 것이 실수였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안흥왕찐빵’이란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하면서 전국 곳곳에 자리 잡았던 ‘심순녀 안흥찐빵’ 프랜차이즈점 100여 곳이 등져버렸다. 그 사이 마을 사람들까지 등을 돌렸다. 3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심순녀 안흥찐빵’이라는 상표는 얻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린 후였다. 할머니는 “그 시절이 이 세상 어떤 지옥보다 무서운 지옥이었다”라고 말한다. 마을과 함께 잘 해보자는 의미에서 추진한 ‘안흥찐빵협회’도 마을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아 무산됐다. 한 사람의 열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 상품에 대한 애착으로 심순녀 찐빵이 만들어졌다. 사랑의 손맛으로 이어온 심순녀 찐빵은 해외 수출까지 했었지만 아쉽게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심순녀 찐빵은 냉동판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해외에 도착하면 찐빵이 상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출하자고 맛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록 수출은 하지 않지만 국내 여행 중 심순녀 할머니의 40여 년 전통 찐빵을 맛보기 위해 해외 손님들이 늘어가고 있다. 심순녀 찐빵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방식을 고집해 자연 발효와 자연 건조를 시킨다. 또한 국산 팥과 최고급 밀가루를 사용하고 있다. 기계가 아닌 수작업으로 이어지는 심순녀 찐빵은 항상 바른길로 변함없이 이어 갈 것이라는 할머니의 정성이 담겨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녹아내리고 있다. 김태봉씨는 “먼 곳에서 심순녀 찐빵을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먼저 존경스럽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며 “지금까지 어머니는 찐빵의 역사를 써오셨다면, 나는 심순녀라는 이름의 역사를 쓰고 싶다. ‘한석봉과 신사임당’처럼 어머니를 ‘심사임당’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강원본부 = 조민지 기자 기사제보 - newsshare@newsshare.co.kr < ⓒ 뉴스쉐어 - 시대를 이끄는 새로운 정론. > 28 <저작권자 ⓒ 뉴스쉐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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