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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교회 지표… 군산 구암교회에서 찾다

1919년 한강 이남 최초 3·1운동 시작점이 된 구암교회

이연희 기자 | 기사입력 2018/10/22 [01:00]

[기획] 한국교회 지표… 군산 구암교회에서 찾다

1919년 한강 이남 최초 3·1운동 시작점이 된 구암교회
이연희 기자 | 입력 : 2018/10/22 [01:00]

 

▲ 전북 군산 구암교회는 한국 기독교 성지순례지로 많은 기독교인이 찾는다. 전킨 선교사가 세운 구암교회는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항일운동과 거점이 돼 한강 이남 최초 3·5만세운동을 불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이연희 기자


[뉴스쉐어=이연희 기자] 일제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 살아있는 근대역사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전북 군산시는 항일운동도 더 강하게 일어난 지역이다. 

 

올해는 한국교회가 일제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80년째 되는 해다. 

 

이 가운데 지난 1919년 3월 군산 구암교회 교인이 보여준 애국애족의 정신과 신앙으로 지킨 곧은 절개는 한국교회를 향해 일침을 가한다. 

 

군산 구암교회는 한국 기독교 성지순례지로 주로 기독교인들이 주말에 많이 찾는다. 많을 때는 하루에도 500여 명 정도가 다녀간다. 

 

지난 20일 오후에 찾은 구암교회에는 대전에서 온 10여 명의 방문객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교회와 인근에 조성된 군산 3·1운동 100주년 기념관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한 방문객은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탄압에 굴복하지 않은 당시 교인들은 친일 부역이라는 과오를 남긴 한국교회와 대조적”이라며 “나라와 믿음을 지키겠다는 교인들의 그 정신은 정치 야합과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잡음이 끊이지 않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삼아야 할 지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 구암교회에는 한강 이남 최초 3·5 만세운동 역사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 이연희 기자

 

민족 항쟁 정신이 깃든 교회 

 

구암교회는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 거사가 시작된 기점이 된다. 그 불씨를 지핀 장본인은 구암교회 교인이었던 김병수 학생이다. 

 

당시 군산영명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전학생이었던 김병수는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전달받아 군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영명학교 스승이자 구암교회 장로였던 박연세, 이두열에게 독립선언서를 28일 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3500장을 복사하고 수백 장의 태극기를 비밀리에 만들기 시작하고 3월 6일 서래장날에 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하지만 3월 4일 아침 일본 경찰의 심문으로 거사 기일이 누설되고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고석주, 송정헌 등이 잡혀갔다. 

 

이때 김윤식 교사를 중심으로 격분한 학생들이 모여 잡혀간 교사 석방을 위한 시위가 첫 만세 시위운동이 됐다. 

 

3월 5일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고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까지 합세해 500여 명으로 늘어나 서래장터를 지나 군산경찰서까지 갔다. 

 

이것은 한강 이남 최초 만세 운동이 됐고 군산 3·5만세 운동으로 불리게 됐다. 

 

▲ 군산 구암 'ㄱ'교회 모습(좌)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순교자 이상태 집사.    [제공=군산구암교회]

 

“우상숭배 하는 나라는 망한다” 신사참배 거부한 사람들 

 

역사 깊은 구암교회를 살펴보면 항일운동 근간이 되는 인물들과 많은 관련이 있다. 

 

구암교회는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1865~1908) 선교사를 통해 세워졌다. 전킨 선교사는 한국식 이름인 전위렴으로 개명했다. 전위렴 목사는 1902년 3월 군산 호남 선교스테이션 계획에 따라 구암리 15번지 땅을 매입해 ‘ㄱ’자형 교회를 세웠다. 

 

전위렴 목사부부는 사랑채에서 주민을 모아놓고 교육을 시작해 영명학교(현 제일고등학교)와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로 발전하는 데 이르렀다. 

 

특히 멜본딘여학교 학생들은 3·5만세운동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에 적극 참여한 주역들이다. 이 때문에 멜본딘여학교는 폐교 위기를 맞았다.  

 

또, 끝까지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은 강제 출국 됐다. 

 

현재 군산 구암교회 이성수 장로의 부친인 순교자 이상태 집사도 주목할 만하다. 

 

이상태 집사는 “우상숭배 하는 나라는 망한다”라고 외치고 교회와 군산노회에서 일본의 강요에 못 이겨 신사참배 결의할 때 크게 반대했다. 

 

이상태 집사는 서울에서 노방전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수배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돼 심한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 18일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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