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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스틸 라이프(Still Life)’,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파괴된 현재와 기약없는 미래, 이것도 삶

김태훈 기자 | 기사입력 2012/01/26 [15:56]

[기자수첩] ‘스틸 라이프(Still Life)’,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파괴된 현재와 기약없는 미래, 이것도 삶
김태훈 기자 | 입력 : 2012/01/26 [15:56]
지아장커의 영화에서 극과 다큐멘터리의 구분은 없어진다.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하는 샨샤의 절경을 보며,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다음으로 넘어가면서 극 중 인물들의 발길을 따라가는 여로엔 온통 폐허뿐이다.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 정책의 부산물로 망가진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는지 감독은 비행접시를 등장시키고, 로켓처럼 발사되는 미완성 건축물을 프레임 안에 집어넣어 꿈으로 치환해 버리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다.
 
파괴로 인한 아픔의 현장, 그러나 그들은 무덤덤하다
 
성장을 위해 파괴하지만, 남는 건 이별과 상실의 아픔뿐. 그럼에도 무덤덤하기만 한 ‘스틸라이프’의 배우들은 장하기까지하다. 호들갑을 떨만한 상황에서도 그들은 차분하다. 10년 전에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말에도 아내가 이사했다는 소식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슬프다. 이런 사회의 모습이 무덤덤한 일상이 됐다는 소리니 말이다.
 
물가의 한적한 풍광과 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휴대 전화를 만지는 사람들을 카메라는 차근차근 훑어간다.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들에서 보이던 두루마기 숏처럼 정물화를 그리듯 수평 트래킹은 회화적이다. 리얼리즘의 요소를 취하면서도 형식미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말 이 영화는 완전하다.
 
답사를 나간 현장에서 3일 만에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했다는 비화를 나는 믿을 수 없다. 영화의 물적 제반요소들을 능숙히 조작하는 솜씨는 면밀한 준비와 구상 없이는 해내기 어렵다. 영화란 게 참으로 묘한 것이 더럽고 추적추적한 광경을 보여주는데도, 정작 그 안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으러 가지만…
 
그러나 유람선과 물로 대표되는 ‘흐름’의 이미지는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모든 것들을 빨아들인다. 댐 건설이후 수장돼가는 고장처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가라앉는 데서 생겨나는 슬픔. ‘스틸 라이프’는 아내를 찾아 16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중년의 탄광 노동자 한산밍과 2년 전 떠나가 연락이 두절된 남편을 찾으려는 여자 센홍을 양대 축으로 펼쳐진다.
 
다시 오기 이전의 것들이 수장돼버린 망향의 공간에서, 인물들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러 온다. 그러나 영화는 옛일을 회상하는 값싼 추억 따위를 집어넣지 않으며, 샨시에서 상하이로 떠나는 센홍의 후일담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도, 미지를 향한 동경도 없다. 부서진 공간 위에 발을 딛고 선 이들 뿐이다.
 
근대성을 뜻하는 영단어 ‘모더니티(Modernity)’의 어원은 라틴어의 Moda에서 온 것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쉴 새 없이 일하고 움직이지만 이 모든 부산함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스틸 라이프(Still Life)라는 영어 제목의 통찰력은 근대화의 이런 속성을 잔인하리만큼 꿰뚫어본다. 
 
미래는 없다,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그들
 
현재가 수장된 자리에 희망찬 미래가 들어서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전혀 없다. 파괴의 현재는 건설의 미래를 불러오지만, 건설된 것의 현재는 파괴의 미래라는 측면에서 자기 순환적이다. 모든 것은 죽어버린 정물처럼 정지 상태에 놓여있고 모든 시점의 시간들은 현재의 무한한 진행으로 고착화된다.
 
동네 건달들은 백지를 달러, 유로화, 인민폐로 바꾸는 하찮은 마술을 부리고 관람료를 갈취한다. 돈을 내놓으라 협박하는 자에게 한산밍은 아무렇지도 않게 칼을 뽑아든다. 버스터 키튼의 코미디처럼 무표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희극성은 그나마 웃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자본의 파렴치한 속성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밝혀준다.
 
돈을 벌어 쇼를 하고 쇼를 해서 돈을 버는 순환을 통한 확장성. 자본주의 사회의 진풍경은 계속 된다. 질리지도 않게 보여주는 파괴된 이미지의 연속은 특별한 강조점 없이 롱숏으로 담담히 보여진다. 유람선 안내 방송에서 알려준, 차오른 물의 수위는 숙박할 방을 구하는 한산밍의 근처에서 철거반원들이 건물 벽에 페인트칠로 쓰는 156.3m로 다시 확인된다.
 
잠시 머무는 이곳도 곧 물에 잠기고 말 것이며 사람들은 짐을 싸고 어딘가로 가야 할 것이다. 뿌리 잃은 사람들은 결국 표류한다. 그들은 부초만도 못하며 유령처럼 떠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불안정만을 생산한다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근대화의 그늘에서, 그러나 또 다른 무언가를 안고…
 
한산밍의 처소 텔레비전에는 영화 프로그램이 틀어져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홍콩 느와르 ‘영웅본색’이다. 청년 마크는 지폐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고, 한산밍과의 대화에서는 나름 폼 나는 대사를 내뱉는데 이는 영락없는 주윤발의 모사이며 스스로도 그렇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엔 주윤발의 킬러 캐릭터란 홍콩의 야수적 자본주의 속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협객의 의라는 시대착오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가는 실패자의 자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청년 마크는 죽는다. 일터인 건설현장의 무너진 파편에 깔려서. 주윤발은 총탄에 맞아죽고 마크는 콘크리트 무더기에 짓눌려죽는데 둘은 이로서 근대화의 피해자로서 동일시된다.
 
노동자들은 검게 탄 근육을 놀린다. 곡괭이질을 하며 부수고 또 부순다. 그들은 현실 부적응자는 아니지만, 사회의 하찮은 일을 도맡는 하층민이다. 여기서 비관 일변도일 수 있는 영화의 감정선을 균형 있게 잡아주는 요소 중 하나가 이들의 건강한 육체다. 그들은 살아있고 살아갈 것이며 튼실한 몸으로 세파를 견뎌나갈 것이다.
 
기약 없는 회복의 꿈
 
산밍이 안개 낀 산하를 바라볼 때 영화의 축은 그 건너편에서 다른 길을 향하는 센홍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우리는 그녀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산밍의 관점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센홍이 접하는 세상은 온전하다. 페허만을 보아왔던 자의 여정에서 정돈된 시가지의 광경을 이어 붙인다는 건 순차적이다. 파괴의 미래형은 건설이라는 것.
 
센홍은 남편이 일하던 공장을 찾지만 그곳은 가동을 멈춘 지 오래다. 남편은 떠났다. 아내가 공장에 도착해서 지난 시간은 현재와 조우한다. 센홍은 여기서 문화재관리청 직원인 남편의 친구를 만난다. 그는 서한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는 중이다. 여자는 망실된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러나 조우와 재결합이 실패할 것은 자명하다. 유물이 발견돼도 그건 박제된 시대의 흔적일 뿐이며, 그나마도 발굴될 전망은 전무하다. 남편의 친구와 대화하는 센홍을 잡는 카메라는 원경으로 멀리 서있는 가건물을 중앙에 비추는데, 아직 건설 중인 건물은 밤에 로켓처럼 우주로 쏘아 올려진다. 건설이 진행 중인 미래의 구축물은 가망 없는 영영 미완성의 상태에서 머물게 되는 것이다.
 
회복의 꿈은 헛되고 기약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고 있음을 알게 된 센홍은 남은 사랑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상하이로 발걸음을 돌린다. 미련 없이 새 삶을 찾으러. 시가지보다 번화한 장소로 이동함은 이 시가지에도 보다 부유함과 번화함을 추구하려는 파괴의 손길이 미칠 것을 암시한다. 남편은 건설회사의 임원이고 그의 정부가 회사의 여사장이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지아장커는 영화에서 산밍과 센홍을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서 영화가 치정극으로 전락하는 교과서적인 실수를 회피하고 있다. 영화 중간에 꼬마가 흥얼거리는 싸구려 가요나 길거리 가수의 노래는 산밍과 노동자들에겐 고향에 대한 회한과 향수의 노래다.
 
회복은 없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
 
그러나 과거의 복기는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하더라도 힘겹기 그지 없으며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산밍과 노동자들은 벅차다. 그들은 옛날에 대한 저자신들의 그리움을 배반하고 다시 망치와 곡괭이를 들고 건물을 때려 부순다.
 
이 점은 산밍이 도망간 아내와 딸을 되찾으려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녀는 오빠가 진 빚을 대신하고자 붙들려있고, 산밍이 그녀와 혈육을 되찾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인민들의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서도 서비스와 물건이 재화와 교환되는 자본의 논리가 침투해있다. 인정이니 뭐니 해도 대가를 받지 않고 넘겨주는 법 따위는 없다.
 
산밍이 아내에게 받은 사탕을 도로 건네는 장면은 이를 함축하면서도, 반대로 인간관계에서 조차 교환 논리가 유효한게 아닐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나 관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건 화해가 아니라 자본이다.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산밍은 다시 탄광에서 1년간 노동할 각오를 한다.
 
동행하려는 동료들에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 광원 일의 위험성을 주지시키는 산밍의 말에 모든 이들은 침묵하고 방에는 정적이 감돈다. 그 자리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자본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간에게 드리워진 체제의 그림자다. 지금은 실감나지 않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으며 수위를 높여가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그들을 덮칠 것이다.
 
기약 없는 외줄타기 미래 속으로…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다음날 일행은 길을 떠난다. 이곳에 남아 있어봐야 방도는 없고 현재를 살아가려면 하는 수 없다. 카메라는 고된 노동으로 지쳐 늘어진 어깨위에 바랑을 지고 메는 이들의 뒷모습을 비춘다. 머물 수 있는 땅은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차오르는 물로 표현되는 메타적인 힘, 당의 권력이나 자본의 위력 앞에서 무력하게 혹은 헐값에 빼앗길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유랑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진다.
 
뒤돌아보는 산밍의 눈가에 외줄을 타는 사람이 잡힌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 마지막 숏을 상기하게 하는 스틸 라이프 최후의 숏. 다른 영역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자의 길은 마치 외줄타는 광대의 그것과 닮았다. 한 번에 도약해 넘어갈 수 없으며 제자리에서 멈추거나 느린 걸음을 내딛을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힘들다면 줄 아래 나락으로 추락해 한 많은 삶에 종지부를 찍는 수밖에 없을 터. 광부가 되어 떠나는 일행의 장래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예고다.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에도 빚 갚을 돈을 다 모을 때까지 살아있으리라는, 그리고 미래는 달라질 거라는 보장은 없거나 희박해 보인다. 내러티브 전개상 있을 이유가 없음에도, 없으면 안 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그림이야말로 영화의 위대함이다.
 
스틸 라이프의 미덕, 이는 현실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현재를 꾸준히 응시하는 여유로운 태도에 있다. 앞으로의 삶이 희망도 될 수 있고 절망도 될 수 있으며, 양쪽 모두가 되더라도 상관없다. 어짜피 삶은 계속되는 것이기에.

기자수첩 =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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